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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토모의 역사


에도 시대: 스미토모의 시작과 벳시 구리광산

스미토모 경영 철학의 원형은 스미토모 가문의 시조인 스미토모 마사토모가 상인의 상도의와 행동 방침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남긴 '시조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미토모는 초창기에 구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품을 팔아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스미토모의 역사는 17세기에 교토에서 책과 약재를 파는 가게를 시작한 스미토모 마사토모(1585~1652)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사토모는 '시조의 가르침'이라는 형식으로 후세에 물려줄 가르침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상업활동을 영위함에 있어 중요한 점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사토모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스미토모 경영 철학'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는 '장사를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상황에서 범사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힘쓰라'고 가르치면서, 단순히 돈을 버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깊이 신뢰할만한 인물이 되도록 인격을 도야하라고 이릅니다. 본문에서는 성실성, 신중함, 건전한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스미토모 마사토모의 목상

거의 같은 시기에, 교토에서 이즈미야라는 상호로 구리 제련/세공업을 운영하던 마사토모의 매형 소가 리에몬(1572 - 1636)이 각고의 노력 끝에 구리 원석에서 은을 추출하는 '난반부키(Western Refining)'라는 구리 제련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리에몬의 장남으로, 마사토모의 딸과 혼인하여 스미토모가의 일원이 된 스미토모 도모모치(1607 - 1662)는 오사카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다른 구리 제련소에 '난반부키' 기술을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라 스미토모/이즈미야는 '난반부키의 최고 가문'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고, 이후 일본에서는 오사카가 구리 제련업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스미토모가 남긴 시조의 가르침

에도 시대의 일본은 세계 최고의 구리 생산국 중 하나였습니다. 구리 무역으로 시작한 이즈미야는 실, 섬유, 설탕, 약품 거래로 사업 범위를 넓혀 "오사카에 이즈미야와 겨룰 상대는 아무도 없다"는 말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스미토모가 최초 개발한 구리 제련법

이즈미야는 다음으로 구리광산업에 진출해 1691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벳시 구리광산을 열었습니다. 벳시 구리광산은 283년간 계속 조업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바로 스미토모 사업의 근간을 형성했습니다.

구리봉, 원형 구리 주괴

[스미토모 사료관]

메이지 시대 이후: 스미토모의 확장기

스미토모는 메이지 유신의 혼란을 극복하고 서구의 새로운 선진 기술을 도입해 다양한 사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벳시 구리광산은 구리 가격의 하락으로 고통받았고, 설상가상으로 메이지 유신의 시대적 혼란 상황에서 운영비까지 급격히 치솟는 바람에 재정적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당시 광산 총책임자였던 히로세 사이헤이(1828-1914)는 서구 기술을 받아들여 광산 운영을 현대화하여 극적인 채굴량 증대에 성공했습니다.

1890년대의 벳시 구리광산

스미토모는 벳시 구리광산 사업을 기반으로 임업, 석탄광산, 건설, 기계, 화학, 전선 제조, 금속 등 다양한 관련 사업에 속속 진출했습니다. 스미토모가 에도 시대에 운영했던 '료우가에교(両替業)'(환전) 사업 역시 벳시 구리광산을 운영해 벌어들인 자금을 활용하여 은행업, 창고보험, 신탁 등, 더욱 복잡한 금융사업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스미토모는 광산/제조와 금융이라는 두 가지 주요 분야에 주력하는 현대적 재벌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재식림 사업 이전의 벳시 구리광산

벳시 구리광산은 스미토모에 번영을 안겨주었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구리광산의 급속한 현대화로 인해 주변 산악지대의 삼림 파괴로 이어졌고 제련소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황 가스로 인해 나무가 하나씩 죽어가고 농작물 피해가 잇따랐습니다. 벳시 산림지대가 황폐화되는 걸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우주만물,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자연의 섭리와 도덕적 원칙에 반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스미토모의 제2대 총수였던 이바 데이고(1847-1926)는 제련소를 해안에서 20km 떨어진 무인도로 이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또한 재식림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전문 엔지니어도 고용했습니다. 벳시 구리광산 주변으로 복원 후 푸르게 우거진 산의 현재 풍경을 보면 스미토모 경영 철학의 신조 중 하나인 다음 신조를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자기와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고, 사익과 공익은 하나로 같은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기업 사명 선언문 보기

현재의 벳시 구리광산
시사카지마 제련소

[스미토모 사료관]

스미토모상사의 탄생과 성장

전후의 폐허와 재벌 해체의 혼란에서 재건한 스미토모상사

스미토모상사는 원래 스미토모와 다른 회사들에 의해 1919년에 오사카북항주식회사(이후 스미토모토지공무주식회사로 개칭)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당시 스미토모 총수였던 후루타 슈노스케는 필연적으로 재벌 해체 명령이 떨어질 것을 내다보고, 그처럼 중대한 위기의 시국에 첫째, 지나치게 문어발처럼 뻗은 기업 구조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각 직원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일을 주어 인재가 일이 없어 빠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며 새로운 사업을 계획합니다. 둘째, 본국으로 송환된 인력과 그 가족에게까지 완전한 구제를 제공하여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셋째, 가능한 한 이들이 국민과 국가에 미래의 번영을 가져다줄 새로운 목표로 눈을 돌리도록 함으로써 스미토모 기업의 몰락을 막는다는 것이 회사의 정책임을 선언했습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후루타 총수는 무역업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5년 11월에 회사 이름을 스미토모토지공무주식회사에서 일본건설산업주식회사로 바꾸었는데, 이를 계기로 무역 사업을 공식 출범했습니다. 일본건설산업의 본사 판매부서는 1946년 1월에 조직되었습니다. 당시 부서원 인원수는 32명에 불과했는데, 전부 무역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아마추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건설산업 사장이었고 이후에 스미토모상사의 초대 사장이 된 도지 슌야는 '열성적인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뛰어나다'라면서 직원들을 독려했다고 합니다.

초창기의 최대 문제는 회사 경영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도지 사장은 엄격한 신용 관리와 다른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건전한 경영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회사의 해외사업 확장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1950년에는 봄베이(지금의 뭄바이)에 첫 주재원을 파견하고 1952년에는 뉴욕에 미국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1952년에는 회사명을 스미토모상사로 바꾸어 이름과 사업 모두 명실공히 스미토모그룹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사업 범위를 급격히 확장하면서 사업부를 구분하지 않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대규모 프로젝트, 자원 개발, 신산업 육성을 열정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사는 꾸준히 종합무역상사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갔습니다.

스미토모상사의 역사

오사카 북항의 본사(스미토모 본사 별관, 구 데이코쿠자 극장)

[스미토모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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